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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교육청 창원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사람책,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단계별 자서전 쓰기/출생부터 유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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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별 자서전 쓰기(출생~유년 시절)

 

나는 경남 밀양에서도 산이 깊은 동네에서 1976년 햇살 풍부한 가을에 21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나의 부모님은 어린 나이에 부부의 연을 맺어 가정을 이루었다. 나의 어머니의 결혼은 외할머니의 재가를 위해 군식구 하나 덜어내는 의미였고, 아버지는 할머니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함으로 서로의 필요 관계에 의한 결혼의 시작이었다.

어머니의 결혼생활은 시작과 거의 동시에 아버지를 군대에 보내고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임신한 몸으로 집안 살림뿐만 아니라 밥벌이까지 해야 하는 16살 어린 신부가 감내하기에는 너무도 고단한 삶이었을 것이다.

 

볕이 뜨거운 가을날 어린 대추나무가 몇 그루 심겨 있는 그늘이라고는 없는 곳에서 나는 3살 아래 동생과 흙장난을 하며 놀고 있다.

6살 나와 3살의 남동생이 흙장난을 하는 대추나무밭 옆에서는 가을 벼 베기가 한창이다. 나의 부모님과 3살 위 오빠가 그 논에서 벼 베기를 하는 일꾼이다.

나의 유년 시절 기억의 대부분은 햇볕이 따가운 날 가을걷이하는 들판이다.

봄볕은 며느리를 쬐고 가을볕에 딸을 쬔다라는 말이 그나마 다행으로 느껴지는 것은 어린 우리 남매들의 놀이터였고, 노동 현장이었던 들판의 따가운 햇볕이 부모님의 죄의식을 조금 소멸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내 유년 시절은 이렇게 어린 동생을 돌보거나 집안일을 하고 깜깜한 칠흑 같은 어둠을 몸소 경험할 수 있는 시간까지 들과 밭에서 부모님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거나, 어느 정도 컸을 때부터는 일을 함께한 노동의 경험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농경사회에서 식구의 수는 노동력을 의미한다. 특히 농촌에서 어른 여성의 몫은 가히 엄청나다.

나의 어머니는 결혼의 시작부터 시어머니의 빈자리가 엄청나게 컸을 테다. 홀로 집안 살림과 육아, 들일 밭일의 주체여야 했으니 말이다.

그런 어머니는 잠시라도 쉬는 날이 있으면 일찍 글을 깨친 나를 밖에서 놀리는 것보다 집 안에서 책을 읽게 하셨다.

지금도 그때의 그 기억은 왠지 모를 슬픔이며, 외로움이며, 안타까움으로 남아 있다.

동기간에 홀로 성이 달라서이기도 하겠고, 어머니 자신의 못 배운 한을 어떻게든 내 아이에게는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 그나마 조금 더 뛰어난 아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어린 나는 어머니의 욕구 충족을 위한 대리인이었고, 힘든 노동의 주체로서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데 실패하는 계기가 되었다.